[인생 2막] 기술사가 대리운전을 하는 까닭은?
얼마전 휴일에 고양 인근에 있는 역사 깊은 컨트리클럽에서 라운딩을 했다.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 라운딩 후 점심 자리에서 반주가 돌았는데 분위기상 몇잔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대리기사 신세를 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라운딩 후 샤워와 식사, 술 몇잔을 하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잠이 쏟아진다. 잠을 자려다 인사치례로 대리기사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가 들어보이시는데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이제 62세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신데 대리운전을 하시네요”
“하하, 재미있습니다. 놀면 뭐합니까”
여기까지는 그냥 흔히 보는 대리기사로만 알았다.
대화가 끊기고 눈이 감기려는 순간, “제가 이래봬도 토목시공 기술사입니다”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네, 기술사 이시라고요, 그거 따기 어려운 자격증 아닙니까?”
“그렇죠, 서울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노후를 위해 50대 초반에 땄습니다. 5년 이상 공부 열심히 했지요”
여기까지 듣다보니 잠이 확 달아났다. 대리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잠 한숨 자지 않고 어느새 집앞까지 도착했다.
필자도 과거 기자시절 서울시청을 출입해본 경험이 있어 서로 아는 공무원 이야기,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등 많은 이야기를 했다. 도착해서는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또 보자며 명함까지 교환했다.
70년대 인기가 높았던 명문 부산공고를 졸업하고 서울시 토목직 공무원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분은 앞서 말한대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그 어렵다는 기술사 자격을 취득했다. 지금 모 엔지니어링회사에 소속돼 1주일에 두차례 회사에 출근해 기술사 업무를 하고 월 300만원 이상을 받는다고 한다.
“공무원 연금을 포함하면 적어도 월 500만원 이상을 버실텐데 왜 대리운전까지 하시느냐”는 질문에 “놀면 뭐합니까. 살살 바람도 쐬면서 친구들과 마실 소주값이라도 번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운전한다”고 답한다.
집이 있는 고양 근처에서 하루에 보통 2~3건 정도 대리운전을 하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신속하게 대리운전 현장을 도착해 나중에는 자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가져온다고 한다.
“60세가 넘는데도 그렇게 열심히 사시니 사모님이 무척 좋아하시겠다”고 하니 “사고를 가끔 쳐서 그런지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고 시큰둥하게 답한다.
그분은 “술을 좋아하시고 목소리가 커서 그런지 가끔 술자리 시비가 붙는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자신은 대리운전하는 것이 절대 부끄럽지 않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가난했고 젊어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기회만 되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요즘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은퇴하고 나와서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는데 너무 폼나는 일만 찾다 보면 아무것도 하기 어렵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얼마전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부부의 적정 은퇴생활비 추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은퇴한 뒤에 중산층으로 살려면 최소 월 260만원이 넘는 생활비를 감당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적정 은퇴생활비란 부부가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비용을 말한다. 중산층은 전체 소득자를 한줄로 세웠을 때 정중앙에 위치한 사람의 소득(중위소득) 위아래로 50%의 소득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연구소가 추정한 적정 은퇴생활비는 현재 우리나라 은퇴자의 실제 월평균 생활비 164만원보다 훨씬 많은 생활비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적정 은퇴생활비를 계산하면서 1인 가구를 빼고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유지하는 조건 등을 붙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60대 보다 50대 부부의 적정 은퇴생활비가 더 높게 나온 것은 결혼 전 자녀와 동거하는 기간 등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연령대별로 적정 은퇴생활비는 차이가 있다. 50대 2인 이상은 298만원, 60대 2인 이상은 258만원이다.
적정은퇴생활비는 조사방식과 기관에 따라 다르다. 국민연금연구원이 올해 실시한 노후준비 패널조사에서 적정 은퇴생활비는 월 193만원, 통계청이 지난해 실시한 가계금융복지조사에서는 월 247만원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은퇴후에도 새로운 직업이 필요한 실정이다. 2013년 7월말 기준으로 20년 이상 가입한 국민연금 수급자들의 월 평균연금 액은 84만4000원에 불과하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재무’ 은퇴준비지수는 51.4점으로 전 영역중 가장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가구의 절반이 재무적 은퇴 준비에 위험신호가 켜진 것이다. 위험집단과 양호집단의 재무준비 수준 편차가 다른 영역에 비해 매우 컸다. 양호집단은 78.7점으로 비교적 높은 수준인데 반해 위험집단은 35.1점으로 격차가 무려 43.6점이나 차이가 났다.
특히 소득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소득(근로소득, 연금소득, 사업소득)이 없는 노인은 201만명이지만 노인 포함 가구 중 월소득이 500만원을 초과하는 비율은 7.7%에 달했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50만원 미만인 소득으로 사는 노인 포함 가구는 전체 중 20.3%였지만 200만원 이상인 소득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비율도 35.9%일 정도로 노인들 사이에 불평등 정도가 심했다.
윤희숙 KDI 연구위원은 "노인들은 향후 기하급수로 늘어나기 때문에 노인들 소득ㆍ자산 양극화 문제는 향후 우리 경제에 최대 현안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60대, 심지어는 70대까지 일을 해야 한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정년퇴직 후에도 가장 오래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선진국들은 정년퇴직 나이 이전에 조기 은퇴하는 경우가 많아 대조를 이뤘다. 이는 그만큼 한국이 노후 생활에 대한 경제적 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OECD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한국 남성의 실질(유효) 은퇴연령은 평균 71.1세로 멕시코(72.3세)에 이어 2위였다. 여성은 평균 69.8세로 칠레(70.4세)에 이어 역시 2위를 차지했다. 실질(유효) 은퇴연령은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빠져 더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나이로 실질적인 은퇴 시점을 뜻한다.
매경이코노미 최근호는 ‘베이비 부머의 화려한 인생 2막’를 커버 스토리로 다뤘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인생 2막 사례들이 소개됐다.
50대 이상 인구가 1600만명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인생 2막도 2막이려니와 한국졍제동력을 위해서도 이들의 경제활동은 중요한 문제이다.
NH농협은행 지점장이었던 이준용(65)씨는 지난 2007년에 30년 넘게 일한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1년간 쉬다가 고향인 안동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을 시작했다. 퇴직 후 취미삼아 다니던 역사 문화 강좌를 통해 안동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역사와 관련된 공부를 외우고 또 외웠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해설사가 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도서관을 오가며 새로 알게 된 내용들은 스토리에 맞춰 다시 추가했다. 그 과정에서 유명한 해설사들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경복궁을 찾은 것만 서른번이 넘는다.
지난 2011년 문화관광부가 ‘명인’ 문화관광해설사를 선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해설사들이 각자 주어진 5분 동안 해설 시연을 하며 경합하는 자리였는데 그는 350여명의 쟁쟁한 경북지역 해설사들을 제치고 당당히 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해설사 활동을 시작한지 22개월만이었다. 그래서인지 해설사의 한달 근무일수인 15일 외에도 개인적으로 문화해설을 요청해 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덕분에 안동시 근무수당외에도 따로 매달 150만원 가량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노희성 유한대 세무회계과 교수(58)는 IBK은행에서 인사부장 등으로 30여년을 보낸 후 산학협력중점교수제도를 활용해 교수가 됐다. 산학협력중점교수는 현업에서 전문성과 경력을 위주로 교수를 채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인사부장을 지내 채용전문가로서 인정을 받아 대학교수로 채용된 후 학생들을 기업에 현장실습 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우재룡 한국은퇴연구소장은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위해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생 1막이 끝나고 2막이 열리기 전에는 하프타임이 있는데 이 기간을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모색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프타임을 얼마나 보람있게 보냈느냐에 따라 2막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그는 6가지 고민에 대해 답을 얻었을 때 인생 2막을 열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첫째,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어떤 사람으로 변하길 원하는가.
셋째,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넷째, 재능을 살려서 더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다섯째, 앞으로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여섯째, 어떤 환경이 나에게 적합한가?
이제 100세 시대가 더 이상 구호만이 아니다. ‘120세까지 살라’는 말은 이제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누구나 인생 2막을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인생 2막은 1막과는 달라야 한다.
물론 1막에서 어떤 준비를 했느냐에 따라 2막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본질적으로 인생 2막은 1막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주위 눈치보지 말고 자신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나름 행복한 2막’을 준비해보자.
[윤형식 매경닷컴 총괄국장] 2014.07.18 | [윤형식 기자의 설레는 은퇴, 두려운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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